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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07월 31일(주) 주일 낮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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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누가복음10:25-37)

 

영국 수상 글래드스턴이 국회에서 주요문제로 살벌한 청문회가 진행되던 중 벌어진 일이다. 국회직원으로부터 쪽지를 건네받은 수상은 마이크에 대고 일방적으로 말했다. ‘국회위원 여러분, 청문회를 잠시 연기해 주세요.’ 하더니 총알처럼 달려 나갔다. 이에 위원들은, ‘어디로 도망치느냐? 국회를 무시하느냐?’ 수상이 달려간 곳은 병원이었다. 자기를 수 십 년 섬기던 마부가 임종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수상은 죽어가는 마부의 손을 꽉 붙잡아 주자 미소를 지으며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수상은 마부의 임종을 지켜주고 곧바로 국회로 급히 복귀했다. 국회 문을 열고 들어서자 모든 국회위원들은 기립박수로 수상을 맞이해 주었다고 한다. 수상의 따뜻한 인간애가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규정이나 형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이다. 현대는 초고속 소통의 시대다. 광통신, 고속전철, 쾌속정, 초고속 인터넷전자산업의 발달로 무슨 일이든 단 몇 시간 몇 분이면 전 세계가 다 알게 될 만큼 모든 왕래가 빨라졌다. 모두 다 성경이 예언한 바대로다. 비행기 배 자동차 기차 전화 핸디 인터넷하면 연상되는 게 있다. 소통과 접촉이다. 현 시대의 화두는 단연 정보 연결과 만남이다. 이런 관계가 증폭되는 곳이 교회 공동체다. 교회란 세상에서만이 아니라 하늘과도 소통과 연결을 시도하는 곳이다. 그 모든 관계에서 필수적인 요소는 사랑이다.

 

1.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10:25)

당시 큰 화제를 일으키고 계신 예수께 한 율법사가 찾아와 자기 과시와 예수님을 시험코자 고매한 질문을 한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느냐?’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율법사는 영생을 질문했는데 주님의 답은 사랑이었다.

 

2. 누가 내 이웃입니까? (10:29)

이 말은 율법사는 되물은 말이다. 이에 주님은 저 유명 한 여리고로 가다가 강도 만난 자를 도운 선한 사마리아사람 이야기를 하셨다. 그리고 질문하셨다. 네가 보기엔 누가 강도만난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율법사는 애써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답 대신 '자비를 베픈 자니이다라고 에둘러 대답한다. 나 중심의 삶에서 너 중심의 삶으로 율법사는, ‘내 이웃이 누구냐?’고 질문했는데, 주님은 누가 너의 이웃이냐?’고 되물으셨다. 율법사가 내게 너는 어떤 존재냐?’로 접근했다면 주님은 상대가 네게 어떤 존재냐?’로 사고의 틀을 바꾸고 적어도 상대방 입장 중심으로 바꿔야 사랑이 가능하다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아무리 선을 행하고 생명을 살려내는 큰일을 해도 사마리아 같은 사람을 이웃으로 둘 수는 없다는 편협성을 드러내고 만다. 그는 이로서 작은 자존심 살렸으나 형제도 영생도 잃게 된다. 오늘본문의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당시 서로 원수지간인 유대사람이 강도를 만나 거반 죽어가는 사람을 포도주와 기름으로 응급처치를 한 다음 자기 나귀에 태워 주막집으로 데려간다. 완치를 부탁하며 치료비가 더 들면 다시 와서 빚을 갚겠다고 한다. 이 짧은 기사 내용에, 예수님의 구속사역과 교회정체성과 성령의 역사와 재림과 상급신앙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특별히 주막집을 독일어로는 먹거리와 잠자리가 넉넉한 곳을 의미한다. 사마리아 사람이 주막집으로 환자를 데려간 것처럼 교회란 선교와 전도와 치유와 양육과 선한 사역을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감당하는 곳이어야 한다. 주막집과 같은 교회가 되기를 소망해 본다.

 

3. 성전에서 예배와 삶의 예배

제사장과 레위인은 종교규범(시신을 만지면 안됨)을 어길 수도 있다는 노파심 때문에 거반

죽어가는 사람의 치료를 회피하고 만다.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예배의 집중도가 높은 민족

도 드물 것이다. 그러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과 비교해서 세상에서의 삶의 예배는 비교적 지나칠 만큼 부족하다. 그러나 히13:16절에,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고 하셨다. 곧 삶에서의 선을 행하는 예배를 강조하신 것이다.

 

나가는 말

이웃 사랑은 하나님 사랑과 분리될 수 없다. 25:44b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곧 사람에게 대하는 태도가 하나님과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성경은 분명이 못박고 있다. 따라서 이웃 사랑은 하나님 사랑이 전제될 때에만 온전해질 수 있는 것이다. 이웃의 선을 인정하는 것이 덕이라면, 그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사랑이며, 행동하는 신앙이 영생에 이르게 한다. 영생의 전제는 이웃 사랑에 있으며, 이웃 사랑은 하나님 사랑과 직결된 것으로 이는 두 가지 사랑이 아니라 하나의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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